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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동산, 한얼산 기도원

"개만 아니면 방언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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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학
기사입력 2009-04-20

필자가 강원도 춘천에 갔다가 오면서 가끔 들러 기도하러 가는 곳이 한얼산 기도원 이다. 한국교회의 불법, 부패, 인간 쓰레기들, 판검사, 오명, 누명,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얼산 기도원은  50-60대 정도 나이가 든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다녀갔던 기도원일 것이다. 
 
한얼산 기도원은 필자가 79년도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대학문제로 고민할 무렵, 캐나다 베리에서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박심목사(당시 고등부 부장집사)의 청으로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친구와 둘이서 차비만 달랑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처음 간 기도원이었다. 박심목사는 이천석목사의 저서, "와장창주장창"을 쓰기도 했던 분이다.  
 
필자는 한양공고 화공과를 나와 공대로 가려고 했지만 동계진학에 실패하면서 대학문제를 위해서 금식기도를 작정하기 위해 기도원에 갔던 것이다. 당시 기능사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한양공대에 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인문대(종교학, 철학)를 나오고 신학을 하고 법학(교회법, 사회법)을 하게 되었다.  공대와는 전혀 다른 학문이다. 미국에서 D.Min 논문을 쓰면서 미국장로교, 스코틀랜드 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미국개혁교단, 영국장로교의 헌법을 비교연구 하였다. 한국에 와서는 강원대학법무대학원에서는 70학점을 이수하고 교회재산법에 대해서 연구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한얼산 기도원에서 친구(도승민목사)와 필자는 방언의 은사까지 받고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예쁘장한 여학생을 처음 만난 곳이라 은혜와 로맨스가 있는 남달리 애착이 많은 기도원 이다. 친구는 자신은 금식을 포기하고 여학생들이 라면을 끓여주어서 먹기로 했다며 그 여학생 친자매를 필자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그 여학생은 눈이 크고, 단발머리에 볼이 사과처럼 붉었고 학생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 생기가 있었고 쾌활했고, 그늘진 모습이 없었다. 당시는 눈이 많이 와서 잣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눈으로 아름답게 덮여 있어서 다람쥐라도 건들면 눈이 밑으로 하얗게 뿌려질 것만 같았다. 눈을 맞으며 잣나무 밑을 그 여학생과 함께 금식을 포기하고 라면을 먹으면서 둘이 걷고 싶었을 정도였다. 
 


▲   한얼산 기도원  © 황규학


 
기도원밖을 나설 때면 얼음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두근반 거리는 가슴을 더 진동시키곤 하였다. 그래도 그 여학생보다는 대학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여학생이 하루 먼저 기도원을 떠날 때는 허전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허기진 배를 잡고 버틸 수 밖에 없었고, 지상 최대의 목적,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 대한 목표의식을 흐리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얼산 기도원은 지금도 눈이 펑펑 쏟아지거나 근처로 지나갈 때면 그 여학생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추억의 명소이기도 하다. 그 여학생은 신림동에 살았기 때문에 필자가 대학을 가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를 들어가서 그 여학생을 만나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재수할 때, 여학생은 필자를 제일성도교회 부흥회(최귀라, 강승구목사)에 초청해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 데모가 심할 무렵, 그 여학생을 한 번 만나 딱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세번 이상 못만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289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 여학생이 사는 신림동에 차가 설 때는 혹시 그 여학생이 나타나지 않을 까 조바심 거린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해진 운영은 서울대 밖이 아니라 서울대 안에서 황진伊의 이자를 사용하는 지금의 이선伊 라는 아내를 만나는 것이었다. 행복의 문은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     ©황규학
 
아내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동생(당시 초등학교 5학년)과 여동생(당시 중3)을 양육해서, 남동생은 서울대의대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병원원장에재직해 있고, 여동생은 경희대를 나와 바로 회계사 고시에 합격했다.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필자는 아내를 만나면서 교단까지 바꾸었고 아내때문에 교단까지 바꾸는 사람은 필자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는 합동측 소속이라 총신대학원에 갈려고 했고, 아내는 장신대학원에 갈려고 했었다. 아내는 민경설목사가 시무하는 광진교회출신이기 때문에 장신대를 가려고 하였었다. 아내때문에 나의 인생은 바뀌어서 예장통합교단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아내는 필자와 함께 동대학, 동대학원(장신대, 플로리다 신학교)에 다녀 지겨울 정도로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아내는 플로리다 신학교(D.Min)에서 여성리더십을 전공했고, 현재 장신대학원(선교학)에서 논문(Th.D)을 쓰는 중에 있다. 현재는 청파동 교회(이건호목사)에서 파트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개봉동에 살았던 아내와 싸울 때마다 신림동에 살았던 옛여학생이 생각나는 것은 신앙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기도로도 안되는 것 같다. 개봉동보다 신림동이 더 선호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봉동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81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필자는 전두한 독재정권타도 데모에 앞장 서 기도원에서 만났던 여학생에 대한 관심이 약해진데다가, 숯기가 없어 그 여학생을 만나자고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만남은 허용이 되지를 않았다. 마음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이후 그 여학생은 필자가 군대에 있을 무렵, 85년에 결혼해서, 미국에서 목사 사모가 되었다고 한다. 한얼산 기도원을 가면 가끔 그 여학생이 생각나곤 한다. 필자의 아내는 88년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듣다가 만났다.
 
당시 79년 한얼산 기도원에서 필자는 대학을 목표로 금식을 했지만 목표가 없었던 친구(도승민 목사)는 금식을 포기하고 여학생들과 라면을 먹느라 필자의 허기가 더 심했던 것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당시 라면을 먹던 친구는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었다. 당시 여학생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라면을 먹지않고 목표를 갖고 금식을 했더라면 필자와 함께 동대학에 들어갔을 텐데 못내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여학생과 라면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요사이도 종암동을 갈 때마다 이천석목사가 세운 성복중앙교회를 보면 늘 한얼산 기도원 생각이 난다. 가끔 한얼산 기도원을 가면 옛추억들이 아련히 생각나고, 이천석목사의 쩌렁쩌렁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아 필자에게는 은혜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고, 축복의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한얼산 기도원에서 찬양을 했던 최귀라, 강승구씨를 마이애미에서 만났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많은 얘기를주고 받기도 했다. 춘천에 갔다가 오면서 작년에 이영금목사를 만날 때는 그에게서 아이들과 같은 순수함과 아버지의 모습을 느낄수가 있었다.     
 
필자는 1979년 밤 12시에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대학문제를 갖고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겠다고 기도하던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공고생인 필자가 서울대에 들어갈 수있도록 한얼산에서 기도의 응답을 해주셨다.
 
필자에게는 한얼산이 야곱이 응답을 받은 베델이었다. 당시 필자에게는 대학의 문제가 너무나도 큰 문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훗날 한얼산 기도원에서 받은 성령체험은 대학교와 신학교를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도 방언에 대해 리포트를 발표할 때 학점 A를 받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어려울 때마다 옛벧엘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다시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한얼산 기도원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전도사들은 한얼산 기도원가를 자주 부르게 하였다.      

 
한반도 감도는 북한 강물에 발목을 담그며 우뚝 선 성산...
얼굴과 얼굴에 화평을 삼고....
산마다 골마다 풍성한 은혜....







▲     © 황규학

 
▲     © 황규학

 
70년대 후반, 한얼산 기도원장 이천석목사는 한 다리에 고무다리를 끼고, 한얼산기도원에 모인 수천 명앞에서 집회를 인도하곤 했다.
 

▲   생전의 이천석 목사 

 
허름한 기도원이었지만 겨울방학만 되면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은 모두 성전에서 숙식을 하곤하였고, 세수는 얼음밑으로 흐르는 차디찬 물로 씼곤 하였다. 

 

▲     © 황규학
 

기도원에는 1,2,3,층까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   한얼산기도원 신축예배  © 황규학

  
당시 부흥회가 전국을 휩쓸 무렵, 이천석목사는 그 한가운에 서 있었고, 조용기목사와 더불어 한국의 부흥계를 인도했다. 한얼산 기도원은 방학만 되면 신도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천석목사의 흥겨운 설교에 넋을 잃기도 했다. 

 

▲   설교하는 이천석 목사  

 
이목사는 "개만 아니면 방언을 다 받는다"고 하여 한얼산 이목사의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90%이상이 방언을 체험하도록 하는 방언의 은사가 있었다. 그의 손이 머리에 닿기만 하면 방언이 터져나왔다. 집회가 끝나면 고무다리를 질질 끌고 수천명의 신도들을 안수 했기 때문에 고무다리와 살갗이 닿은 부분에 피가 줄줄 흘렀다고 한다. 
 

 
▲   안수하는 이천석 목사  
    
 
이목사는 77년 12월 24일(우연히도 성탄 전야였다) 차범근에게 20분간 안수기도를 해주어 몸이 완치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했다. 그 이후 차범근은 절실한 기독교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외에 탁구선수 양영자씨의 팔꿈치 관절염을 고치기도 하여 두 사람 모두를 크리스찬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많은 범죄자들이나 조직폭력배들이 이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복하여 목사가 되기도 하였다. 현행 대형교회 목사들도 이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깨지고 새사람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설교시 욕을 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하류층에 있는 민중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이목사는 '욕도 은혜'라며 자신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긴 모습대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좋은 반응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다. 감리교  임마누엘의 김국도 목사, 이태희 목사, 최귀라, 강승구목사 등이 모두 이천석목사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최귀라, 강승구씨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같은 배를 타고 담소를 나눈 적도 있었다.  
 
심령 깨지는 소리, "와장창주장창"

이천석목사는 당시 설교도 중, 성령에 의해 심령이 깨지는 모습을 "와장창주장창"이라고 하면서 신도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상이용사시절 이성봉목사 집회를 방해하러 갔다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 태백산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하고, 부흥사의 길로 올랐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당했지만, 자신의 생긴모습대로 목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여 거룩성의 목회를 접고, 뚝배기성의 목회를 하여 목회성공을 하게된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신유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전도사시절, 기차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아들의 소아마비를 고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불치병을 고치게 되어, 그의 구수한 설교를 듣고, 치유차 많은 신도들이 전국에서 한얼산 기도원을 찾았다.
 
당시 한얼산 기도원에서 자주 부르던 가스펠송 중의 하나는 한얼산 기도원가"와 남북통일 노래로서 가사는 "한다리 바쳐서 못이룬 통일 남은 다리 주께 바쳐 통일해 보자"는 노래였다. 또한 자주 부르던 찬송가는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Amazing grace"(나같은 죄인 살리신)이었다. 이목사는 "나같은 x년 살리신"으로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다.
 



▲    찬양인도하는 이천석목사


그러나 한국 부흥계를 주도했던 이천석목사는 그토록 원했던 여의도 순복음 집회를 하고, 뇌출혈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항간에서는 당시 전두환정권이 많은 목사들을 부정축재라고 하여 안기부 데리고 가서 고문을 하였다는 소문이 많았다.  
 
당시 이목사도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그 후유증으로 이목사는 뇌출혈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지성인들이 보기에는 거친 설교를 하곤했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간증과 유모어는 뭇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늘 물질과의 관계가 잘통해야 하는 물통, 사람과의 관계가 잘 통하는 인통,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 신통을 강조했다. 물통, 인통, 신통을 외치면서 우스개소리로 깡통을 외치기도 했다.    
 
이천석 목사 이어받은 이영금 목사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는 전도사였지만 지금은 장남 이영금목사가 한얼산 기도원 원장으로서 설교를 인도하고 있다. 그 역시 이천석목사가 주장했던 설교의 라인에서 부흥의 설교를 하고 있다. 한얼산 기도원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복을 받고, 실제로 많은 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   이영금 목사  © 황규학

▲     © 황규학

 
한국에서 웬만한 기독교인이라면 한얼산 기도원은 누구나가 한번 쯤은 다녀갔을 것이다. 잣나무가 우거지고, 계곡의 물소리가 세차게 흐르며, 신도들의 통성기도가 울려퍼지고, 겨울이면 잣나무가지위에 내린 흰눈송이들이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산타가 올 것만도 같은 모양을 한 곳. 그러한 한얼산에 이천석목사의 "와장창중창주장창" 의 음성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     © 황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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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산 기도원에는 이천석 목사 묘소가 있어서 지금도 기도원에 찾아온 신도들에게 "한얼산 기도원은 개만 아니면 방언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의 기도원"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천석목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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