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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교회사에 나타난 이단판별의 역사와 향후 전망(1)

아디오포라적 요소는 이단기준 될 수 없어...귀신론해석도 아디오포라적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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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현
기사입력 2012-11-03

▲     ©법과 교회


이 글은 부산장신대 원성현교수가 쓴 글이다. 이단판별의 역사에 대해서 지금까지 나온 글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성있게 잘 정리된 글이다.  원박사는 특히 귀신론의 해석에 대한 것은 아디아포라(임의로 해석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적 요소로서 이단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디아포라적인 것으로 귀신론 해석, 성만찬, 예복, 예배시간, 예정론, 성상, 필리오케 논쟁을 들고 있다. 오늘날 이단감별사나 교단이대위는 디아포라적인 적이 아니라 아디아포라적인 것으로 이단을 정죄하고 있다. 이단정죄는 디아포라적(삼위일체, 기독론, 신론 등)인 것만을 갖고 정죄해야 한다.  원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 법과 교회

▲     © 법과 교회


원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지금까지 대부분은 디아포라적인 것이 아니라 아디아포라적인 것을 갖고 이단정죄를 해온 것이다. 각교단의 이대위는 이단기준을 디아포라적인 것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원성현교수는 연세대 100년 역사에 전과목 만점으로 수석 졸업한 천재적인 학자이다. 그는 연세대 대학원도 수석으로 입학을 한 보기드문 천재교수 이다. 원교수는 불어, 라틴어, 독어에도 발군의 실력자이다. 각교단 이대위 위원들은 원교수의 글을 탐독할 필요성이 있다. 더이상 아디오포라적인 것을 갖고서 이단정죄하는 누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원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까지 교단 이대위나 이단감별사들은 박윤식, 윤석전, 조용기, 류광수, 이명범, 예태해, 김기동 등에 대해 아디오포라적인 요소를 갖고 이단정죄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대위는 디아포라적인 것을 갖고 이단정죄를 할 필요성이 있다.        

서구교회사에 나타난 이단판별의 역사와 향후 전망

―프로파간다(Propaganda)・솔리다리티(Solidarity)・똘레랑스(Tolerance)・디스꾸르(Discourse)의 차원에서―
부산장신대학교 초빙교수 / 서양교회사전공 신학박사(Ph.D) / 원성현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초대교회시대: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1) 초대교회 전기의 교회이단
     (2) 초대교회 후기의 교리이단
     (3) 공의회의 이단판별 기준
    3. 중세교회시대: 독선과 마녀적 종교재판
     (1) 중세 초기의 정통과 이단
     (2) 중세 말기의 이단과 신비주의 운동
     (3) 독선적 이단판별과 압제적 종교재판 및 형벌
  4. 종교개혁시대: 다양한 기준(Canon)과 신앙규칙(fomula fides)
     (1) 기독교 종파의 분립과 다양한 신앙규칙
     (2) ‘아디아포라’(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문제) 원칙의 제시
     (3) 꽁지스뜨와(Consistory)를 통한 이단판별과 똘레랑스
  5. 근대교회시대: 다채로운 이단분파의 재흥
     (1) 이단분파의 온상적 환경
     (2) 다양한 이단종파들
     (3) 디아포라(‘중요한 점’)에 의한 이단판별
  6. 근대후기교회시대: 연대(Solidarity)와 관용(Tolerance)
     (1) 신종교운동과 뉴에이지운동의 발흥
     (2) 기존 종교들의 공존시대
     (3) 정통기독교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솔리다리티와 똘레랑스
  7.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이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비정통 이단신앙과 운동의 선두주자는 에비온파를 포함한 유대주의 기독교 이단이었고, 현행 포스트모던 시대를 관통해 달리는 주자는 신종교문화운동인 뉴에이지운동과 현대 신혼합주의 종교인 신종교운동으로 대변된다. 물론 전자는 후자에 예속되는 유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선두 및 현행 주자들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이단종파운동들이 생성, 소멸, 진행되어왔었다.

그런데 정통기독교(원시 초대교회, 중세 로마카톨릭교회, 근세 종교개혁파, 근대 정통파 등)의 한결 같은 그들에 관한 태도는 철저한 응징, 즉 파문이나 사형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물론 초대교회시대나 계몽주의시대 이후에는 이단문제로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때로는 시기나 사안별로 관용을 베풀었던 적도 있었고, 그리하여 정통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분파들은 세계 오지로 나가 선교(프로파간다)에 힘쓰기도 했다. 특히 네스토리우스파나 단성론자들과 같은 교리적 이단분파들이 중앙아시아 등지로 내몰려 선교의 첨단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곧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경교라 불리며 중국 일부를 기독교화하기도 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시대에 신론 문제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 곧 비잔틴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로마카톨릭교회)가 서로를 정죄했고, 그 둘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소위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며, 본질에 있어서도 성부와 다르다는 주장―과 ‘삼위일체론’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그 두 교회는 갈라져왔었다. 서방교회의 탄핵으로 말미암아 동방교회는 “서방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며, 완전히 서방교회에서 분리 독립해 나갔고, 서로를 파문했던 것이다.

루터(독일), 쯔빙글리(쮜리히), 깔뱅(제네바) 등이 대표하는 종교개혁교회는 동서방교회 모두가 초대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의 정통성을 예수운동, 사도운동 등과 연계하여 찾았다. 게다가 초대교회의 이단운동파들, 중세 이후의 이단 및 신비주의 운동들, 종교개혁기의 급진파인 재세례파운동, 근대 이후의 신흥종교적 이단운동들 등이 합세하여 일약 지금 세계는 종교분파들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다 세계종교인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여타 종교들로부터 파생한 새로운 신종교운동파들이 가세하여 현행 세계종교계와 특히 기독교계의 혼란상과 난맥상은 가히 역사상 최고조에 달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빚어낸 양극화현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문화현상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종교와 문화들이 혼합되어 있는 포스트모던 리얼리티 하에서, 이제 현대 기독교와 교회는 타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만 할 것인가 하는 이슈와 아젠다가 큰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의 신학계는 종류에 관계없이 비기독교적인 타자들을 일률적으로 이단, 사이비, 신종교 등으로 정죄해 왔었다. 특히 중세의 로마카톨릭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대의 개혁파는 모든 타자적 운동들을 파문하고 정죄해오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카톨릭교회를 이단시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기도 하다.

담론의 질서와 타자철학을 최우선시하는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연 그러한 배타주의적 경향을 취하는 자세가 옳은 태도인가? 또 어떤 현대의 급진적 개혁파는 타종교와 다른 집단에 대해 너무나도 개방적인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우리 정통 개혁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를 피력하고 제시하기 위해 이 글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단 판별에 대한 역사를 탐구해보고, 거기서 취득한 장단점을 가지고 향후 취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바이다.
 
물론 이는 기독교 절대 절명의 지상 최후명령인 선교(프로파간다)와 연대적 형제사랑(솔리다리티),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망딸리떼)인 관용의 정신(똘레랑스)과 다른 점을 확인하는 담론의 형성(디스꾸르) 등을 모두 함축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돌파구를 찾기를 거부하고 그 시대의 망딸리떼를 따르지 않는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똘레랑스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초대교회시대: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1) 초대교회 전기의 교회이단

유대주의 이단이었던 에비온파는 유대교사상에 입각해서 마태복음을 제외한 모든 신약성서를 부정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고, 그를 예언자 중 일인으로 여겼다. 유대파 기독교는 바울 중심의 헬라파 기독교와 다투면서 율법과 할례준수를 구원의 관건으로 삼기도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강력히 성토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 대형이단이었던 영지주의 기독교는 헬라철학, 유대교, 기독교 등을 혼합한 전통적 혼합주의 종교였다. 그들은 구원의 열쇠인 비밀지식(gnosis)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지주의의 대표격인 도마복음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연원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영적 혼인합일의 길을 아는 지식을 ‘깨닫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최초로 기독교에 자력종교, 각성종교의 다른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물론 영지주의 기독교는 선한 하나님 사상에 기인하여 악한 물질을 창조한 창조주 구약신앙을 배격했다. 구원의 비밀지식(비의), 믿음과 행위의 합작 등으로 받는 구원은 신비적 영적 체험과 여행을 통해 가능해지며, 오직 구원비의의 전승을 배타독점적으로 전수받아 이를 깨달은 자만이 신인합일의 신비적 혼인체험(bridal chamber)을 겪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계급구원설이었으며, 이는 향후 제도화된 로마카톨릭의 성속구별설에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말시온주의 역시 초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이단들 중의 하나였다. 이단 대부였던 시몬 마구스의 제자 케르돈은 말시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케르돈은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였으므로 말시온에게는 영지주의 색채가 짙게 깔여 있었다. 케르돈은 선신과 악신 등 이원론적 두 신을 주장했고, 신구약의 통일성을 거부하면서 가현설을 주창했다. 말시온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과 몸의 실재를 부인했다. 그는 누가복음을 제외한 모든 복음서를 거부했고 바울서신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름대로의 말시온 정경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 역시 완전인과 보통인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전자만이 극단적인 금욕을 통해 세례 받은 자가 되었다. 이들은 5세기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전수시켰다.
    
몬타누스주의는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한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이었다. 그들은 영적 황홀감(엑스터시)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의 계시라고 여겼다. 금욕(결혼금지), 급박한 종말론과 종말의 날 예언, 환상주의 신앙 등에 빠진 이들의 신앙은 5세기까지 아프리카 등지에서 존속했고,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서는 더 오래 존속했으나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이와 같은 상술한 초대교회 4대 이단이었던 유대주의,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정상적인 구원론을 배격했고, 또한 구원을 받을 자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정통교회에서 너무 멀리 이탈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정통 초대교회는 저들과의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를 할 여지가 너무나도 희박하게 되었다.
 
(2) 초대교회 후기의 교리이단

영지주의는 비기독교 종교철학이었고, 말시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간 분파적 이단운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이단들로서 정통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집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논하는 후기의 교리이단은 정통교회가 정죄하여 파문한 이단파였기 때문에 그들 역시 후대의 교회사가들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단일신론이나 단성론을 추종했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물론 이는 이성과 이해의 측면에서 그러했고 신앙과는 무관했다. 그들은 영지주의나 말시온주의가 주창했던 이원론적 신관(선신과 악신)을 극복하려고 했던 동기에서 단일군주신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어디에서도 유래되지 않은 온전한 신성은 오직 유일하게 ‘신성의 원천’인 성부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적이고, 비록 유래된 것이긴 하지만 신성의 모든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다. 피조물들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그들은 성부와 협동하고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인 생명을 전달해준다.” 이는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가장 미약하게 주장한 말로서, 결국 그는 종속론의 대부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부였던 오리게네스의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은, 그보다 더 강력한 형태인 사모사타의 바울의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 혹은 ‘양식론적 단일군주신론’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adoptionism)은 역동적 단일군주신론(dynamic monarchism)으로도 부른다. 로마의 테오도투스는 “예수는 세례 시에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단순한 인간’(psilos anthropos)’이다” 라고 선포했다. 하르낙은 그를 ‘이단자로 규정된 최초의 기독교인’이라고 언급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이적을 거부하는 합리주의 계열의 양자론을 적극 인정하였고, 주후 2-3세기의 양자론자들이야말로 참된 비평가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완전한 참 하나님과 완전한 참 인간’이라는 두 슬로건을 주창한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양자론을 당대의 역사 무대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 라는 양자론의 현대 추종자들이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들이었다. 19세기 초, 알브레흐트 리츨은 예수를 가장 완벽한 임무를 자각한 인물로 보았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를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여겼다. 20세기 초의 존 로빈슨은 예수를 하나님에게 완벽하게 정직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으로 보았다.

초기의 원시 양자론적 견해는 3세기 말에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전개되어 다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그는 예수가 단순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본 초기 양자론자들과는 달리 예수를 하나님이라 불렀고, 또한 예수의 도덕적 완전성으로, 그리고 수세 시에 받은 이적적인 능력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268년, 안디옥의 지역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는 안디옥의 루키안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와 같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후기 교회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양자론은 5세기가 지나자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다시 꽃피우게 되었다.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modalistic monarchism)은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태 혹은 다른 양식으로 보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풀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성자가 비록 하나님의 신성과는 다르며 어떤 신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양자론자들에게 있어서 성자는 실제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양자로 입양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태론’ 곧 ‘양식론’(modalism)은 당시 정통이라고 자처했던 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지녔던 신학적 오류였다.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유지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양자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면서 신성을 지닌 성부의 신격성의 단일성을 보존했지만,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위격을 포기하면서 신격의 단일성을 보존하려고 했다.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주장하지만, 그 둘을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보지 않았다. 양태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시대에 다른 양태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곧 창조 시에는 성부로서, 율법을 줄 때는 성자로서, 그리고 성자의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서, 다른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이는 성자와 성령의 두 위격을 포기하는 전형적인 합리주의적 설명 형태였다. 이를 따르면, 성자는 가현적으로 인간의 몸을 지니게 되며(성자의 위격이 없기 때문,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을 겸비할 수가 없음), 또한 성부수난설에 직면하게 된다.(성부의 위격만 있고 성자, 성령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는 바로 성부 그 자신이라는 귀결)

최초의 양태론자는 헌신적인 신자였던 소아시아 출신의 프락세아스였다. 그는 박해자 앞에서 신앙을 고백한 용감한 신자(confessor)였다. 그는 새로운 계시를 주창한 몬타누스주의자들을 반대했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는 당시에 성부는 세상의 모든 것보다 너무나도 높이 위에 계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알 수 없으며 형언할 수도 없다고 가르쳤다.(불가지론) 그리스도를 하찮은 에온이라고 말하는 영지주의나,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양자론에 반하여 프락세아스는 성자 스스로가 성부였다고 가르쳐서 영지주의와 양자론을 일거에 격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프락세아스가 성자가 성부였다는 주장, 그 성부가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는 주장 등을 시도하자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반박>은 이를 강력히 응징 대처했다. 영지주의의 신 불가지론, 양자론의 예수의 신성 부인 등은 정통설에 의해 기각되었으나, 그러한 설들과 가장 반대적인 극단에 서 있었던 성자 예수 신성의 긍정설이었던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 일체론, 즉 성부와 성자의 각 위격을 부인함으로써 정통설을 역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에서 프락세아스를 이었던 노에투스는 성부 자신이 고통을 받았고, 죽었으며, 스스로 부활했음을 가르쳤다. 노에투스는 양자론의 회의적인 견해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을 이어받았던 로마의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강조했다. 곧 ‘한 위격, 세 이름들’이라고 가르쳤다. 세 이름들은 단지 계시의 다른 형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자의 존재를 지상적 사역으로 제한했다.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삼위의 위격을 구별하지 못했으나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후기 정통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 곧 아리우스주의는 성자의 입양됨을 통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의 신성만을 드러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의 양자론, 그리고 비록 성자의 신성을 인정했으나 성부의 신성 속에 그것을 함몰시켰던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등을 공박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영원히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성부보다는 하위이나 초자연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갈망했다. 즉 그들은 비록 신성에 있어서 성부보다는 열등하지만, 양자론 및 양태론과는 달리 성자의 독립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곧 그들은 성자의 열등한 신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성부 하위에 둔 것으로써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주창했다. 이는 성자의 신성 그 자체를 부인한 양자론과, 또한 신성을 지닌 성자를 성부 속에 함몰시켰던 양태론을 극복하는 길이었지만, 역시 그것은 열등한 신성의 성자를 만들어, 그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곧 성자는 이 세계의 창조 이전에 창조된 피조물로서 시간적 기원을 지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반신적(semi-divine)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16세기에 세르베투스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했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 분이심이 완전히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더 이상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신적 성자이신 두 번째 위격이 역사적 인간 존재, 곧 나사렛 인간예수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태초에 계셨던 로고스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성육신 역시 삼위일체와 꼭 같이 신비로운 문제였기에 다양한 주장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답변이었던 451년의 칼케돈 신조는 영지주의파나 아리우스파와는 달리 정통교회 내에 머물러 있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성자의 육체성을 거부했던 영지주의적 가현설과의 옹골찬 투쟁은 예수가 외형적 인간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임을, 곧 완전한 참 인간(vere homo)임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성자의 신성이 한 위격이신 성자 내에서 어떻게 인성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었다. 영원하며 선재하신 성자 그리스도와 역사적이며 개인적인 인간 예수가 연합되는 것이 바로 정통교리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4세기 말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의미를 최초로 부각시켰는데, 곧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다. 그 이후 500여 년 이상 동안, 이에 관한 보다 세밀한 수정작업이 네스토리우스주의, 유티케스주의, 단성론, 모네르기즘, 단의론(단일의지론) 등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이 되신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에 관해 상술하려고 했다. 이는 다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공식으로 변개되었다.
 
완전한 하나님으로 선재하시는 성자가 예수의 인성으로 변모했고, 그 인성이 신성화되었다는 것이다. 성육신 때 로고스가 인성을 취했고, 그것이 신성으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인성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안디옥학파는 그에 반대하여 역사적 예수의 인성을 고수하게 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388년에 추방당할 때까지 동방교회에서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밖의 고트족에게로 확산되어 번영해 나갔다. 에베소에서 431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정죄되었다. 네스토리우스와 그가 속한 안디옥학파는 예수의 인성을 보존하기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라고 불렀던 관행을 거부했다. 곧 그러한 용어는 마리아가 낳은 그분이 참 인간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테오토코스가 ‘사람을 낳은 자’(anthropotokos) 개념을 동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를 사용하기를 즐겨 했으며, 이는 신성을 강조했던 알렉산드리아학파나 마리아숭배를 강조했던 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좌우간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성자피조설의 아리우스주의, 그리고 성자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강조했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한 프로소폰(prosopon) 안에서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그 자신은 이 단어를 인격으로 지칭했으나, 그를 반대한 자들은 그 단어가 네스토리우스에게서 ‘모습’(양태)으로 해석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단일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이 세 위격을 포기하고 성자, 성령을 하나의 성부의 신성 안에 함몰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의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이 하나로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성자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보았던 단성론자의 견해와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네스토리우스는 로고스와 인성이 불가분 연합되었으나 두 본성의 혼합이나 변모가 있지 않았으며, 두 본성은 적절히 유지되었고, 인성만 고통을 받아 죽어 부활했으며 단 한 분 성자만이 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이었던 키릴루스는 로마제국의 동방지역을 장악하려는 속셈으로, 그의 정적이었던 네스토리우스가 ‘테오토코스’를 거부했다는 미명 하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즉 네스토리우스가 ‘하나님을 낳은 자’ 개념을 거부했다 하여 성자의 신성을 부인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특히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안디옥학파에 대해 큰 오해를 했는데, 곧 그들이 성자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예수 생애 동안 일어났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키릴루스의 편견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한 키릴루스는 예수의 구원행위들이 인성을 통해서만 일어났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견해였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와 그가 속한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인 로고스가 융합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했다. 네스토리우스는 한 분 그리스도를 두 인격 혹은 두 격체(hypostasis)로 나누었다는 이유로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그는 한 인격 안에 실재성을 지닌 두 본성을 함축한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는 그 두 본성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연결 혹은 결합(synapheia)으로 정의했다. 이는 자연적 혹은 본질적 결합이 아니었다. 로고스는 마치 성소 안에 거하는 것처럼 인간 예수 안에 거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두 본성은 각각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인성만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 등에 속할 수 있고, 신성은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진정한 ‘신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닌 인간’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성질을 분리시키는 안디옥학파의 특성에 따라, 네스토리우스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배격했다. 그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로고스가 탄생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인간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신성의 속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는 그가 테오토코스를 거부한 이유였다. 곧 인간이 신성을 지닌 하나님을 낳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에게서는 안디옥학파의 신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이단 혐의가 전무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던 안디옥학파의 기독론은 자연스레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 즉 두 본성의 속성의 교류를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속성의 교류를 지녔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동방교회의 신임과 명성을 한 몸에 담고 있던 네스토리우스를 시기하여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키릴루스가 444년에 죽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디오스쿠루스가 그를 계승했는데, 그 역시 키릴루스를 따라 안디옥학파를 억압하기 위해 각각의 두 본성의 독립적 병존을 주창하고 두 본성의 속성의 교류를 거부한 안디옥 기독론을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키릴루스와는 달리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각하기 위해 인성을 부인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따랐는데, 이러한 견해가 소위 신알렉산드리아학파였다.

     유티케스가 이를 따라 극단적인 이단적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신알렉산드리아학파의 기독론을 극단적으로 과도하게 밀고 나가면 생길 수 있는 견해였다. 유티케스를 따르면 성육신 이후의 그리스도는 오직 한 성질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두 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성질의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성질로 이루어진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다.” 라는 키릴루스의 언급을 오해한 처사였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언급했다. “하나님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티케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감독 플라비안이 주관한 한 회의에서 파문당했다. 로마교황 레오1세는 플라비안의 손을 들어주었다. 449년, 레오1세가 플라비안에게 보낸 서신은 ‘그리스도의 한 인격과 두 본성에 관한 교리’를 강조했다. 449년, 로마황제의 명령으로 에베소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가 주관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는 정죄되었고 유티케스는 회복되었다. 물론 두 본성 교리를 고수해왔던 안디독학파의 기독론 역시 분쇄되었다. 레오1세는 이를 도적회의라 선언했고, 거기서의 결정을 정죄했으며, 결국 451년에 그 유명한 칼케돈회의가 개최되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성을 희생시켰던 디오스쿠루스는 정죄를 당했다. 칼케돈회의는 키릴루스를 정통이라 선언했고, 레오1세의 서신 곧 ‘한 인격과 두 본성에 관한 교리’에 근거해서 칼케돈 기독론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칼케돈 종교회의 직후에 단성론 논쟁이 격화되었다. 곧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인정한 칼케돈신조를 반대한 자들은 이제 단성론자로 불려졌다.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교회 전체가 열띤 흥분 가운데 휩싸이게 되었다. 단성론자들은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각각 종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서 곱틱교회, 야곱당, 이디오피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강력히 반대했다.

     칼케돈의 결정에 대해 도전한 두 번째 시도가 단의론 논쟁에서 행해졌다.(633-680) 헤라클리우스는 단성론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한 의지’의 작용에 의해 그의 구속사업을 성취했다.” 곧 한 분 그리스도는 한 신적이며 인간적인 능력을 통해 모든 신적이며 인간적인 일들을 행했다는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이러한 단의론을 배격하여 우호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6차 세계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교리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는 두 자연적 의지 혹은 의지 작용을 가지고 있는데…그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그의 인간적 의지는 전능하신 신적 의지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되는 것이다.”    
 
(3) 공의회의 이단판별 기준

양자론과 양태론, 곧 역동적 단일군주신론과 양태적 단일군주신론과 같은 단일신론과 아리우스주의, 즉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 등의 두 신론적 이단이 극복되고 삼위일체 신관이 확립되기에는 2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리게 되었다. 단일신론자들은 하나님의 한 분됨을 확인했고, 또한 성자와 성령이 실재 위격이며 성부와 구별된다는 점을 부인하여 유대주의로 귀환했으며, 아리우스파는 삼위의 구별성은 인정했지만 성자가 완전한 하나님이 됨을 부정했다. 4세기 정통교회는 아리우스파를 혐오했다. 이는 근대 합리주의적 이단종파의 대명사격이었던 유니테리안(18세기에 기적과 신비를 거부하는 이신론의 영향으로 생성된 반삼위일체파 단일신론주의자들)을 정통 개혁파들이 증오했던 것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325년의 니케아공의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천명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다.” 라고 언급했다. 431년의 에베소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이다.” 라고 선포했다. 451년 칼케돈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둘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정통 칼케돈 기독론은 126년이나 걸려 네 번에 걸친 공의회 끝에 산출된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정통교회는 수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에 관한 이단판별의 기준을 마련하여 신조를 결성하게 되었고, 그것은 향후 기독교의 시금석이 되었던 것이다.

     325년의 니케아신조는 교회 역사상 범교회적인 공의회를 열어 작성하고 채택한 신조였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 그 교리에 관한 교회의 공동고백을 확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었고, 이는 아리우스에 의해 배격되었으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정통파의 승리로 이 논쟁이 일단락되었으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 때 니케아신조가 재차 확인될 때까지 이 논쟁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열띤 투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니케아신조는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이란 용어를 사용해서 삼위의 관계를 설명했으나, 이는 더욱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주의의 편을 들어주자 정통파는 열세에 몰렸고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번씩이나 추방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381년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채택되어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 니케아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보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물음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물음이 종결되자 이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과 사람이심, 즉 신성과 인성이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물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사가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곧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가 있느냐 하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곧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오랜 기독론 논쟁은 로마의 감독 레오1세의 청원으로 451년에 열린 칼케돈공의회에서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양성을 분리하는 안디옥학파의 극단적 기독론이나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적 기독론을 배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혼합되지도 않으며, 또한 분리되지도 않고, 속성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도는 단일한 인격을 가진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상술한 부분에 관한 니케아신조의 진술은 이러하다. “하지만 그가 계시지 않았을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그가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 성령이 존재하지 않은 것에서 왔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상이한 실체나 본질에서 유래했거나 창조되었다고 하는 자, 그래서 변화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거룩한 공회가 빛이 서린 표독한 눈으로 되지 않기를 빈다.”

     칼케돈신조의 진술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 한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성자, 주, 두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로 인정하며, 이 두 본성이 혼동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 본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인해 무효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초대교회의 이단판별의 기준은 각 공의회 신조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신론과 기독론을 둘러싸고 몇 차례 걸쳐 개최된 공의회는 삼위가 상이한 본질에서 유래했다거나, 삼위가 변화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서로 혼동하거나, 다른 본성으로 변화된다고 보거나, 분리된다고 여기거나, 대립된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삼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서로 연합되어 있으되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혼동, 분리, 혼합, 변화, 대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단판별의 기준점이었던 것이다.

     상술한 초대교회의 이단판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첫째, 유대주의,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 초대교회 4대 교회이단은 성경,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 등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 초대교회의 변증가들의 저술들을 통해 현격한 이단으로 판별되어 반박되었고(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반박> 등), 결국 저들의 비정통성은 그들 스스로가 저절로 도태되는 자양분이 되었다.

     둘째, 3세기 이후의 신론과 기독론 이단 등의 초대교회 교리이단 판별에 있어서 그릇된 의미의 정치적 이단판별 사례가 있었다. 소위 키릴루스의 네스토리우스 이단정죄가 그것이었다. 이는 단성론 계열의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양성론 전통의 안디옥학파의 알력과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거의 정통교리에 가까웠던 네스토리우스파는 추방당하여 멀리 중국 당나라(‘경교’로 불림, 신라에까지 파급됨)에까지 기독교 선교와 프로파간다를 시행했던 것이다.

     셋째, 정통파에 의해 이단으로 판별된 단성론파는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각각 종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서 곱틱교회, 야곱당, 이디오피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으로 존손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하여 특히 단성론파는 정통교회가 미치지 못하는 오지로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와 기독교 프로파간다를 단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사 중 가장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넷째, 7세기에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기까지 거의 오백년에 걸쳐 이단논쟁이 시행되었다. 정통교리는 정통교회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수백 년에 걸친 교리논쟁을 통해 축적된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곧 정통교리는 전통의 날조가 아니라 창조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똘레랑스(관용정신)가 핵심이 되어서 기독교의 솔리다리티(연대)와 프로파간다(선교)를 단행해나가는 디스꾸르적(담론의 형성) 오늘날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곧 초대교회의 관용과 담론 및 연대와 선교정신을 본받아, 엄격한 기준(3대 이단판별기준: 성경,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으로 이단을 판별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이단판별은 느리고 신중하게, 자세하고 설득력있게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관용과 연대성은 상실될 것이고 외연적인 확대와 담론적 대화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3. 중세교회시대: 독선과 마녀적 종교재판
 
(1) 중세 초기의 정통과 이단

중세 전반기의 반 로마카톨릭적 교리는 초반의 삼대이단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곧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투스주의, 노바티안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로마카톨릭교회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은총론/구원론은 비주류로 밀려났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혹은 세미-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유론/구원론이 정통교리가 되었다.

     뱅상(Vincent)은 급진적인 자유의지론과 행위론적 공로주의 구원론, 원죄부정 등의 신학적 개념을 지녔던 펠라기우스와, 성경에 근거하여 은총론적 구원론―원죄, 속박의지, 은혜, 예정 등―을 주창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모두를 기각하고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의 핵심인 신인협력설적 구원론을 로마카톨릭의 정통 구원론으로 채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적 구원론은 이단설로 정통교리에서 기각되었고,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비로소 정통교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도나투스주의와 노바티안주의는 배교문제로 인한 교회분파운동이었다. 로마의 박해에 굴복하여 배교한 교회지도자들이 행한 성례가 유효한가 하는 점이 논쟁의 관건이었다. 그들은 ‘인효론’(ex opera operantis : “인간이 행한 일로부터”)을 강조하여 배교한 지도자들의 모든 행위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로마카톨릭교회를 떠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효론’(ex opera operata : “행해진 일로부터”)을 주장하여, 성례는 집례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만이 중세 카톨릭교회의 정통교리에 들 수가 있었다.
 
(2) 중세 말기의 이단과 신비주의운동

중세 후반기의 사대 이단은 이원론과 영지주의 등에 근거한 바울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발도파 등이었고 말기에 가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대표한 신비주의 운동이 형제단운동(베긴 형제회, 베가드 자매회 등), 새로운 신앙운동(via moderna) 등과 함께 기승을 부리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운동이었던 위클리프파운동(롤라즈운동), 후스파운동 등이 있었다.

     중세의 바울파의 원조는 전술한 양자론의 태두였던 사모사타의 바울이었고, 그들 스스로는 사도 바울을 그 자신의 기원으로 삼았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에서 시작되었고, 2세기의 이원론적 말시온주의(선신과 악신을 나누며, 육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가현설을 주장함,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을 채택하여 이원론적 사상의 근거로 삼음)를 비롯하여, 아르메니아에 퍼진 단성론도 수용했다.

     중세의 보고밀파는 지하교회 조직을 지녔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보고밀파 감독이었던 바실의 회개를 집요하게 촉구했으나 거부당하여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교회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이러한 이단자의 처형은 비잔틴제국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개 바실과 같이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는 지도자에게만 한한 일이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 이단인 보고밀파의 영적 형제인 카타리파에 대해 평신도, 지도자 할 것 없이 모두 화형에 처했다. 보고밀파 역시 이원론적 마니교와 영지주의를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는 서방교회의 대 이단 태도가 동방교회에 비해 훨씬 더 강력했던 증거라 하겠다.

     동방교회의 보고밀파와 서방교회의 카타리파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조로아스터교처럼 악과 선, 즉 두 영원한 원리를 가르쳤다. 또한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장자인 사타나엘, 차자인 예수이며, 모반한 장자는 하늘에서 추방당해 물질계와 사람을 만들었다. 예수는 말씀으로서 세상에 와서 사타나엘을 패전시켜 사탄이라는 이름만 가지게 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신실한 자들, 즉 보고밀파와 함께 거하도록 했다. 삼위일체도 없고 말씀과 성령은 무인격자이다. 그들의 순결한 삶은 동서방의 정통교회의 난잡하고 비도덕적인 삶과 너무나도 큰 대조를 이루었다. 청빈하고 순결한 삶은 현대의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닮았다.

     중세의 서방교회의 카타리파는 보고밀파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이원론적 교리를 지녔다.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났던 카타리파의 일파인 알비파 역시 카타리파와 동일한 분파였다. ‘카타르’(헬, katharos)는 ‘순수한’이라는 의미이며, 이원론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보고밀파를 척결하기 위해 탄압하자, 서방으로 피난 온 그들이 카타리파가 되었던 것이다. 카타리파의 급성장은 로마교황청으로 하여금 종교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새로 등장한 카타리파운동은 엘리트주의와 금욕주의를 표방했으며, 이는 당시에 타락한 서방교회에 있어서 큰 자극제가 되었다.

     발도파는 ‘가난한 이단’으로서 전술한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타락을 믿었으며, 참회와 성체를 행했지만 오직 신실한 목회자들에게서만 받아들이는 ‘인효론’ 전통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매우 높은 도덕성을 지녔고, 이원론적 이단들이 청결한 지도자에게만 도덕성을 강조하고 평신도에게는 방종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곧 발도파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함축한 영적 지침을 적용했다. 그들은 독점적 사제직을 거부했고, 청결한 자라면 누구든지 사면을 선포하고 성체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루터의 만인사제설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확신했고 카타리파와는 달리 불가타와 같은 신뢰성 있는 성경을 배포했다. 종교개혁파의 개척자들이었지만(평등한 장로주의 회의체를 채택하고 로마카톨릭의 사제직을 부정함), 이원론이나 다른 이단성을 찾을 수 없는 발도파(“리용의 가난한 사람들”)는 개혁파와 교제를 나누었고(마틴 부처가 특히 그러했음), 그들은 개혁파로 전향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최초로 초대교회의 장로직제를 회복하여 개혁파에 이어 주기도 했다. 곧 마틴 부처는 발도파의 장로제를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깔뱅과 낙스가 이어받았다.

     또한 중세 말에는 특히 유명론의 대두와 함께 신비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중세의 종말을 초래하게 되었다. 유명론은 중세 스콜라주의의 실재론을 거부하는 철학이었고(로마카톨릭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존재론의 핵심 코드인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라 이름에 불과하다는 주장), 신비주의 운동은 타락한 중세교회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을 통해 엑스타시적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운동, 즉 잉글랜드의 위클리프파운동(롤라즈운동)과 그의 영향을 받았던 보헤미아와 체코의 후스파운동 등과 함께 중세의 막을 내리게 하는 탈교회적 대형 개인주의 신앙운동이었다.
 
(3) 독선적 이단판별과 압제적 종교재판 및 형벌

이단자들에 대한 핍박은 매우 극악했기 때문에 신앙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 참혹한 고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비잔틴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보고밀의 감독 바실을 처형하여 잔인한 억압을 시작한 후, 정부와 교회의 정책은 정당성을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특히 이단에 대해 동방교회보다 더 극렬했던 태도를 보였던 서방교회는 강력한 정부 중심의 교회가 극심한 핍박을 전개했다.

     동방교회의 알렉시우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근거를 둔 옛 로마제국 법에 따라 이단자를 정죄했다. 그 법은 이단을 중범죄로 다스렸다. 서방교회에서는 로마법이 잘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단에 대한 교회의 형벌만큼은 로마법 그대로 시행되었다. 평신도는 출교를, 성직자는 수도원에 감금했다. 카타리파의 일원이었던 알비파는 그 자신들에 대한 극악한 교회의 처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러한 난폭성은 중세교회의 종교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들게끔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단형벌로서의 벌금형, 재산몰수형, 추방형 등은 감금, 낙인, 그리고 사형 등으로 재빨리 전이되었다. 이는 당시 교회법의 규정을 넘어선 과도한 것이었다. 민법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마니교도를 처형하도록 규정했지만, 1140년 볼로냐의 그라티안이 출판한 로마카톨릭 교회법은 칙령집(Decretum)은 경 추방이나 벌금형에 처할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세교회는 법을 어기고 이단에 대해 스스로 과도한 중벌형에 처했던 것이다.

     특히 서방교회는 이단에 대한 어떤 조직적인 입법조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르만의 대이동은 옛 로마법의 무시를 초래했고, 더욱이 이단은 중요시되지 않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이단혐의자는 성직자나 수도승이었기에 교회법이나 수도원규칙에 따라 처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단운동이 반국가적 모반행위로 전환되었을 때 국가는 이단에 대처하는 입법을 단호히 시행하여 감금, 재산몰수, 사형 등이라는 잔인한 형벌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재판제도는 국가의 강력한 형벌적 지원에 의해 중세교회의 엄청난 무기가 되었고, 그러나 이는 중세교회의 급속한 몰락을 보이는 징조가 되었다. 특히나 스페인에서의 이러한 종교재판은 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잔인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4. 종교개혁시대: 다양한 기준(Canon)과 신앙규칙(fomula fides)
 
(1) 기독교 종파의 분립과 다양한 신앙규칙

종교개혁 이후로 서구의 기독교 판도는 다양하게 정립되었다. 즉 그리스정교회(동방교회), 로마카톨릭교회(서방교회), 종교개혁교회, 재세례파(급진적 종교개혁파), 잉글랜드 국교회(일명 성공회로서 앵글리칸 교회라 칭함) 등 대개 크게는 다섯 기독교 종파가 서구세계를 분할하게 되었다. 이들 간에 종교전쟁이 확산되었다. 루터파와 로마카톨릭 간의 슈말갈덴 전쟁(아우구스부르크종교화약), 개혁파와 프랑스 갈리칸 카톨릭의 위그노전쟁(낭뜨칙령), 전 유럽에 걸친 카톨릭과 개혁파간의 30년 전쟁(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 등으로 인해 유럽은 화약고가 되었고, 전후 “그 지역 군주의 종교가 그 지역 시민들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유럽시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사해주었고, 이는 근대로의 여명이 동트는 징조가 되었다.

     곧 지긋지긋한 장기간의 종교 간의 전쟁시대가 거하고 똘레랑스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중세의 종교전쟁과 교리적 분파대립을 빌미로 기독교를 미신화해버렸고, 이는 종교개혁 이후의 똘레랑스와 디스꾸르를 거부한 신종 종교재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신론(보편적 이성신앙)으로 기존의 정통기독교 교리를 훼파해버렸고, 동일성의 철학으로 중무장한 채, 타자들을 헐뜯는 일을 일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과 진보의 두 수레바퀴는 앞으로 달리면서 뒤에 남겨진 전통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동방교회는 단일신론, 단성론, 단의론 등의 색채를 지녔고, 재세례파는 무정부주의 및 무교회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나머지는 정통 기독론과 삼위일체 신관을 지녔으나, 종파에 따라서 은총론과 자유론으로 나뉘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가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전통을 이어 원죄론과 속박의지, 은총과 예정을 거부하고 인간의 완전교리를 주창했던 웨슬레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도르트종교회의는 도르트신조를 결성해서 ‘칼빈주의 5대교리’를 확정지어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했었다. 결국 종교개혁 이전의 서방교회 독점적 지배 상황에서 이제 사분오열되어 진리체계가 분화되었던 것이며, 이는 관용과 연대 및 선교 등에 있어서 협력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상과제에 놓이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2) ‘아디아포라’(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문제) 원칙의 제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종교개혁은 종교개혁파들의 형식 원리(fomula principia)가 동일함을 보여주었다. 루터, 깔뱅, 쯔빙글리, 멜랑흐톤 등에게 있어서 이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이신칭의 교리, 은총론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간에는 아디아포라에 있어서 차이를 보였다. 즉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는 한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특히 루터는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는 한에서 로마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다.(성경이 금하지 않는 로마교회의 전통은 널리 똘레랑스를 발휘하라는 인정하르는 주장) 성경이 명백히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관습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깔뱅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과 관습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곧 성경이 명하는 로마교회의 관습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라 하고, 이를 ‘규정적 원리’라고 한다. 이는 성경이 명백히 말하는 ‘간섭 받은 영역’이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이 명백히 말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하는데 이는 불간섭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는 ‘성화된 상식’으로서 신앙과 양심 및 상식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예배시의 예복문제, 예배시간, 예배순서 등이 이에 속한다.

     루터는 성상을 아디아포라로 여겼으나 쯔빙글리와 깔뱅은 이를 우상숭배로 규정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디아포라로 여겨 성상 철폐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루터는 십계명 중 제2계 명의 우상숭배 금지령을 형상 금지로 보고, 이를 성상과 차별화한 카톨릭의 견해를 수용했지만, 쯔빙글리와 깔뱅은 성상과 형상을 동일하게 보았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가 성경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하여, 이를 디아포라로 보고 금지했다. 그러나 깔뱅은 고린도전서 1장 16절에 “또한 내가 스데바나 집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으로 세례의 범위를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으로 보아 유아세례를 인정했다. 곧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기에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아디아포라에 해당한다. 즉 어떤 경우에 있어서 깔뱅은 루터의 견해를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멜랑흐톤은 성찬논쟁에서 로마카톨릭의 화체설, 루터의 임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깔뱅의 영적 임재설 등이 성경에 명백한 근거가 없는(“이것은 내 몸과 피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해석의 문제이지 어떤 한 주장을 지탱해주지 않는다는 의미) 아디아포라로 보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교회들이 나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멜랑흐톤은 보기 드문 종교개혁기의 에큐메니칼 운동가였던 것이다.
 
(3) 꽁지스트와(Consistory)를 통한 이단판별과 똘레랑스

기독교 종파의 분립과 아디아포라 원칙은 각 기독교 종파들이 지녀야 할 이단판별과 대처에 관한 원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는 특히 오늘날의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이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근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단판별은 디아포라, 즉 중요한 기준에 근거해서만 시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성경, 전통, 예수의 구원성 등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그 외에 제도와 관습 및 예식의 문제, 아디아포라적인 소소한 교리문제 등으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어떤 한 분파를 이단으로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귀신의 존재에 관한 해석, 아디아포라적인 난해한 성경구절 해석문제, 성찬설에 관한 견해(라드베르투스의 화체설과 라트람누스의 상징설로 대별되어, 이후의 화체설, 임재설, 상징설, 영적 임재설 등이 주창됨), 예정론에 관한 논쟁, 성상논쟁, 필리오케논쟁(성령이 성부로부터, 아니면 성자와 성부로부터 발출되느냐의 논쟁) 등이 이단판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6세기 중반에 깔뱅이 목회를 했던 스위스 제네바교회는 목사회와 ‘꽁지스뜨와’(장로법원)을 두었다. 그런데 꽁지스뜨와는 제네바 시의회의 소관이었고 목사회만 제네바교회가 관장했다. 전자는 시의회에 속한 장로들이 소속되었는데, 이는 제네바교인들의 풍속과 신앙성을 감찰하는 하급심적 일심 재판정의 성격을 지녔다. 각종 경범죄나 신앙을 게을리 한 죄를 범한 교인들은 꽁지스뜨와에 호출되어 재판을 받아 벌금형이나 여타 권징이나 훈계 등의 형벌에 처해졌다. 물론 여기서 처리한 죄목은 수십 가지에 달하며 그 중에 이단 죄도 속해 있었다.

     즉 제네바에서 이단은 꽁지스뜨와의 재판을 받아 처리되었으며, 이는 중세의 종교재판과는 그 맥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장로들의 합심에 의한 심리로 이루어졌기에 과하거나 편파적이지 않았고, 꽁지스뜨와의 일차 목적은 교정과 회심을 염두에 둔 권징에 있었기에 충분한 계고와 권면이 이루어지곤 했다. 이는 과연 똘레랑스의 전형이었다. 이는 또한 제네바시민들이 연대하여 프로파간다를 넓히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제네바교회는 오늘의 장로교회가 아니었다. 곧 치리는 시의회에 속한 장로법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었다. 물론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이를 이어받은 여타 장로교회는 당회를 통해 치리하게 되어 치리권이 시정부에서 교회로 이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깔뱅 당시에도 이전 시대 못지않게 다른 견해들이 난무했다. 볼섹의 예지예정론, 오지안더와 스탄가로의 단성론 및 단의론적 견해, 리베르땅(자유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 등은 아디아포라에 해당하는 것이었기에 깔뱅의 논박적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이단으로 정죄되지는 않았다. 이 역시 똘레랑스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문제는 달랐다. 그의 반 삼위일체론은 당시에 어떤 교회에 속해 있었어도 화형 당할 중범죄였다. 깔뱅을 폄훼하는 해석자의 주장과는 달리 깔뱅은 그의 화형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깔뱅은 로마카톨릭의 전횡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취한 극악한 태도를 그대로 취할 리가 만무했다.
 
5. 근대교회시대: 다채로운 이단분파의 재흥
 
(1) 이단분파의 온상적 환경

근대의 대표적 이단분파들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찬 사이언스 등의 미국에서 발생한 4대 이단들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이 미국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발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미국의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이 이단발생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19세기의 미국사회는 경제불황, 서부개척, 남북전쟁과 남북분열, 자본주의 폐해로 인한 노동문제, 흑인 노예문제, 스페인과의 전쟁수행, 대각성운동의 그림자였던 종파분열의 시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신학적 대립, 카톨릭의 내분사태와 카톨릭에 대한 개혁파의 반대운동 등은 미국이 끓는 가마와 같은 형국지세로 가게 했고, 이러한 종합적 현상은 이단종파가 득세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2) 다양한 이단종파들

이사야 43장 10절, 이사야 44장 8절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이 태동되었다. 아담의 차자인 아벨이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으뜸 되는 여호와의 증인이고 그 후계자는 창설자인 찰스 테즈 럿셀, 과도기의 지도자 조셉 플랭클린 러더포드, 성장기의 나단 노오르(11만 5천명의 증인을 2백만 명 이상으로 성장시킴) 등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의 독점과 자파의 출판물의 우선성, 아리우스주의적 피조물 그리스도론, 성령의 거부, 삼위일체의 부인,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 천사장 미가엘과 예수의 동일성(불순종의 죄로 타락하여 사탄이 된 루시퍼를 예수의 형제로 여김), 행위구원의 강조, 지옥설의 부인(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리 없다는 주장), 선택적 구원론(선택된 자들과 양들 외에는 구원을 못받음), 지상낙원설, 사후 영혼사멸설, 악한 자의 최후 부활 거부, 재림 예언의 남발 등을 주장했다.

     몰몬교 역시 여호와의 증인과 마찬가지로 주도자들의 기존교회의 타락에 대한 불만, 잘못된 성경해석, 주관적인 신앙체험 등에 의해 출발했다. 창시자는 조셉 스미스 2세이다. 그는 한참 교파분쟁이 지속되었던 장로교회에 속한 자로서 그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이탈한 자였다. 그는 몇 차례의 환상을 자신의 신흥이단의 창출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 브라이엄 영은 몰몬교를 성장시켰다. 그는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로 가서 둥지를 틀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주의를 채택하여 25명의 아내와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몰몬교도는 미국 내에서 2천 5백만 명을 웃돌며 그 중 50만 명 이상이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참 신앙의 독점, 몰몬교 집단만의 참교회성, 조셉 스미스 영접을 통한 구원, 교회역사의 정통성 부인, 정통교리의 실패성, 권위의 출처로서의 몰몬경, 성경을 오염된 책으로 봄,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 및 값진 진주를 영감된 유일의 책으로 믿음, 다수의 하나님과 신인동형론적 신관, 성자 부인, 독생자 거부, 삼위의 동일본질성 부정, 만인구원설에 가까운 보편구원론, 사도시대에 끝난 지상교회와 이를 회복하는 몰몬교회론, 침수세례, 일부다처제 등이 몰몬교의 핵심 교리이다.

     안식교는 초창기에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단시하지 않는 경향성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모습을 보면 당시 미국의 천년왕국 사상의 유행기와 맞닿아 있다. 이는 기성종교의 안이한 태도에 대한 반동으로서, 타락한 모습을 지녔던 기성교회는 열정적인 신자들의 불만을 야기시켰고, 이는 새로운 신앙운동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뉴욕주의 중서부 지역은 이러한 신생종교운동의 최적지였고, 약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몰몬교, 강신술, 재림운동 등의 신생종교가 발생했다. 밀러가 창시자였던 안식교 재림운동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지역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윌리암 밀러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후천년설적 재림론(예수께서 천년왕국이 도래한 이후에 재림한다는 주장)에 맞서 새로이 전천년주의적 재림론(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설)을 제기했다. 실제적인 창시자는 엘렌 G. 화이트였는데 사실상의 진원지는 밀러였다. 그는 침례교회에 속했으나 염증을 느낀 나머지 독자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여 1843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으나 불발이 되었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밀러는 다니엘 8장 14절의 2300주야를 2300년으로 계산해서 주전 457년부터 합산하니 1843년이 나왔다는 것이다. 로마력으로 1844년 10월 22일인 그날에 12만 명의 안식교 교인들이 뉴욕주에서 재림을 고대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안식교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종말론주의자 밀러의 세대주의적 시한부 재림신앙에 근거하여 태동했다.

     히람 에드슨은 1844년이 재림의 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의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 해라고 주장하면서, 여기서 죄를 완전히 도말한 후 재림하게 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한편 요셉 베이츠는 안식일을 제정했다. 그는 안식일이 창조 때 예표 된 뒤, 에덴동산에서 명령되었고, 시내산에서 확인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교황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 짐승의 인을 이마에 받은 자라고도 주장했다. 실제적인 창시자 화이트는 감리교 출신이었으나, 이러한 선배들의 이론들을 종합하여 실제적인 안식교의 출범을 가져왔다. 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는 이백 번 이상의 환상을 보았다.

     죄악 된 품성을 소유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의 미완성, 하늘 지성소에서의 조사심판(율법의 표준에 따라 개인의 성품과 생활이 검토됨, 즉 하나님이 친히 지성소에서 의롭다 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 구원이 됨, 신자도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이 막힐 수가 있게 됨, 그리스도의 보혈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되는 길이 막히게 됨)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 죽은 후 조사심판에서 구원의 여부가 가려지며, 구원을 받은 자도 율법준수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이중 구원론, 일요일을 이방인들의 태양우상숭배일로 보고 원래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 등이 안식교의 주된 율법주의적 교리들이다.

     안식교는 흔히 이단종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혼음교리, 이권분쟁, 가정파괴 등과 같은 비도덕적이며 반사회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건한 삶은 청교도를 방불케 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강조하여 세속적 삶, 즉 무도회, 화투, 담배, 술 등을 금하고 검소한 옷차림, 화장금지, 보석 장신구 부착 금지 등 단순하고 검박한 삶을 촉구해왔다. 또한 그들은 사회봉사와 구제활동에 역점을 두고 의료선교, 무공해 농산물과 식품 생산 등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로써 안식교는 자신들에 대한 이단혐의를 어느 정도 가린 듯하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는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했으며, 그녀는 엄격한 예정론을 신봉하는
회중교회 출신이었다. 그녀는 한 때 치명적인 병에 걸렸으나 큐임바이가 개발한 심리치료를 받고 나아 그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최면술과 안수에 의해 병고침을 받은 그녀는 <과학과 건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이를 신적 계시로 주장했다. 성경 외의 계시론, 치유은사를 인간심리 요법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신적 계시로 여김, 이원론적 질병관(병을 망상과 환상으로 보고 이를 정신 및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태도), 하나님을 우주의 무한한 원리나 생명, 진리, 사랑, 혼, 영, 마음 등으로 보는 범신론적 견해, 영적 그리스도만의 주장과 육체의 예수를 거부하는 기독론, 성육신의 부정, 인성의 부인, 부활의 부정, 죄에서의 해방이 없는 병에서의 치유를 구원으로 여김 등이 그들의 지론적 교리이다.
 
(3) 디아포라(‘중요한 점’)에 의한 이단판별

상술한 이들은 정통교리인 디아포라를 명백히 위반했다. 정통적인 삼위일체 신관과 기독론을 그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곧 중요한 점들에서 그들은 성경과 전통과 예수의 유일한 구원성을 위반했다. 이는 명백한 이단으로 판별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 그리고 프로파간다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의 담론(디스꾸르)의 길을 열어 놓아 언제든지 그들을 설득하여 정통의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무가 정통기독교에 지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과의 담론형성은 그들과의 차이점을 노정시킬 뿐이지만, 그러한 접촉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 그리고 디스꾸르를 거부하는 전근대적인 태도가 될 것이다. 정통기독교가 이러한 개방의 방식을 채택할 때, 정통기독교는 타자에 의해 개방과 관용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6. 근대후기교회시대: 연대(Solidarity)와 관용(Tolerance)
 
(1) 신종교운동과 뉴에이지운동의 발흥

신종교(new religion) 혹은 신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새로운 종교현상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운동들은 주로 서구 지성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과학종교(Scientology), 통일교회(Unification Church), 창가학회운동(Soka Gakkai International),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운동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미국, 한국, 일본, 인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캐리비안 지역 등으로까지 널리 확산되어 범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종교운동이다.

     기독교의 맥락에서 형성된 신종교운동들에는 전술한 바가 있는 찰스 러셀의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 조셉 스미스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의 교회(몰몬교), 윌리엄 밀러의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문선명의 통일교, 노엘 스탠톤의 예수군대(Jesus Army), 데이빗 버그의 국제가족회(The Family International) 등이 포함된다.

     이슬람의 맥락에서 형성된 신종교들로서는 바하올라의 바하이신앙(Bahai Faith), 파드 무함마드의 이슬람국가회(Nation of Islam), 미즈라 아흐마드의 아흐마디야운동(Ahmadiyya),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와하비즘(Wahhabism) 등이 있다. 동양의 철학과 사상에 영감을 받은 신종교들은 박티베단타 프라부파다의 국제크리슈나 의식회(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마하리쉬의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데니스 링우드의 삼보불교회(Triratna Buddhist Community), 마끼구찌의 창가학회 등으로 대별된다.

     미확인 물체(UFO)와 관련된 신종교들에는 라엘의 라엘리안 운동(Raelian movement), 보니 네틀의 천국의 문(Heaven’s Gate), 조오지 킹의 에테리우스회(Aetherius Society), 이보 벤다의 우주의 사람들(Universe People), 노만 부부의 우나리우스 과학회(Unarius Academy of Science) 등이 있다. 자아수련과 관련된 신종교들에는 호세 실바의 실바 마인드 콘트롤(Silva Mind Control), 헬렌 슈크만의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s), 마이클 머피의 에살렌 연구소(Esalen Institute), 우명 우승철의 마음수련, 일지 이승헌의 단월드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뉴 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신종교운동들로는 엘리자베스 프라핏의 보편승리교회(Church Universal & Triumphant), 헬레나 불라바스키와 헨리 올코트의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 아일린 카디의 핀드온재단(Findhorn Foundation) 등을 들 수 있다.

     신종교들은 다양한 시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등장하여 그 영향력을 크게 성장시킨 종교공동체들이다. 이 공동체의 창시자나 지도자는 독특한 교육이나 계시의 내용을 통하여 신종교의 기초를 형성하였고 점차 신자를 늘여나갔다. 대부분 의 신종교운동들은 주류 사회와 구별되는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독특한 신념과 의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전에 주류 종교들 안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흐름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혼합적이며 절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신종교운동의 가르침에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으로서 흔히 지적되어 온 지나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정신이 담겨 있거나, 급속한 세속화에 대한 영적인 대응과 재생의 분위기가 강조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신종교운동은 개인의 자립적인 영적 성장을 도모하며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회복과 통합을 모색하고 나아가 마약과 술로부터 도덕적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생활방식을 혁신하고 대체하는 혁신적인 삶의 방식을 표방하기도 한다.

     신종교운동의 일부인 뉴에이지운동은 종교운동보다는 문화운동으로서 더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의 근원은 1875년 뉴욕에서 러시아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설된 신지학협회에 있다. 신지학의 기본명제는 “모든 종교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뉴에이지운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뉴에이지 사상의 출현 배경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세계관, 과학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몰락에 있다. 즉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근거한 과학발전을 통해 인류가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이루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과학만으로는 세계도처의 홍수와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와 기아와 전염병 등의 사태에 적절히 대응할 수가 없고, 오히려 과학만능주의는 생태계 파괴와 핵전쟁의 위협, 인간성 상실 등의 폐해만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과학만능주의의 한계는 모더니즘의 한계점을 드러낸 것이었고, 이러한 모더니즘의 대안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종교와 문화현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적 뉴에이지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뉴에이지 사상은 1960년대 중반, 미국이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민법을 개정한 이후, 힌두교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구루들이 미국에 건너오면서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들이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뉴에이지 사상은 현대문명에 염증을 느낀 현대인들, 특히 서구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현대를 위기와 기회의 시대로 평가한다. 지구의 위기 원인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지만, 이는 무지와 망각으로 인해 사용되지 못했으며, 그 원인은 인류사상과 종교를 지배해왔던 기존의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관들이 인간 스스로를 나약하고 유한하며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와 하나님과 인간의 복종관계가 인류를 위기에 직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곧 오쇼 라즈니시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가 원죄설로써 인간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고, 하나님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장소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 없는 존재로 평가되어 스스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시켰다는 것인데 이는 초대교회 시대의 펠라기우스적 견해, 곧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주창한 인본주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의 굴레를 벗으면,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뉴에이지의 핵심적 주장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주장하고 있다. 

     뉴에이지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이기심을 떠나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숭배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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