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윤항기, "내가 예수믿으면 개항기"

지금은 음악목사이면서 신학교 학장

- 작게+ 크게

홍영일
기사입력 2014-02-03

시련의 고비를 넘어 보니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윤항기(尹恒基/1942년서울 출신) 목사는 한국 최초의 음악목사로 안수를 받고, 현재까지 예음교회 담임 목사로 일하면서 2000년 예음음악신학교를 세우고 현재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수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노래 부르는 모습만 보았지 어려운 고난을 겪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려함 뒤에 그렇게 힘든 시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수 하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경솔함을 반성하게 된다.

윤항기 목사가 꼽는 첫 번째 선물은 어머니이고 두 번째는 동생 복희(1945년생)라고 한다.
아버지 윤부길은 서울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 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하고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연극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직접 대본을 쓰고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하고 연기까지 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오페라부터 악극 연출까지 주도했던 예술계의 선구자였다.  

어머니 성경자 (예명 고향선)은 천재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 무대에서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이 천상의 선녀 같았다고 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었기 때문에 주위 분들이 그 재주가 아깝다고 하였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과 자녀을 위해 가정에 충실하였다.

윤복희(1945년생)는 태생이 울보였다. 복희는 여자아이인데도 성격이 활달해서 오빠 윤항기의 친구들과 놀았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할 때마다 복희가 휩쓸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항기는 어머니 따라 미장원에 갔다가 부주의해서 2층에서 떨어졌는데 어떤 노인(산신령?) 잡아 간신히 살아났는데 다친 데는 없었지만, 충격이 너무 컸는지 말을 못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이 일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박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하던 예술단체의 활동이 어려워져 빚을 지게 되자 집을 넘기게 되었다. 결국, 청계천 다리 밑에서 거지로 살게 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가 우파 연극 그룹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잡히면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할 것은 뻔하므로 숨어지냈다.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충남 대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 탈환과 동시에 다시 서울에 올라왔지만, 다시 1·4후퇴로 인천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UN군 위문단으로 공연료로 담배와 식료품을 받아다가 그것을 팔아 겨우 먹고 살았다. 윤항기는 공연을 떠난 부모와 떨어져 고아원에서 힘들게 지내기도 하였지만 복희마저 부모님한테 보내고는 구두통을 메고 구두닦이도 하고 신문팔이도 하다가 극적으로 부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집안이 일어서는가 했더니 아버지가 마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집안은 풍지박살이 나고 항기와 복희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청계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좀 커가면서 알게 되었지만 큰 어머니라는 분이 아버지의 본처이고 자기 남매는 첩의 자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큰어머니와 누님은 머슴처럼 일을 시키면서 항기와 복희를 때리며 구박하였다. 그러나 큰어머니와 누님은 교회사찰로 교회에서는 천사처럼 구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비뚤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윤항기가 아니라 개항기라고 고함을 질러 대기도 하였다. 윤항기 목사의 파란만장한 생활은 고비마다 어려움이 끈질기게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1976년 몇 달 만에 늦게 집에 돌아온 윤항기는 아내가 집에 없자 교회에 간 아내를 강제로 끌고 나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도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마약과 방탕함으로 재능과 인생을 허비해 버린 윤부길의 아들이었다. 남의 탓만 하는 못된 열등감 덩어리였다. 그런데 포기한 내 인생을 구제하겠다고 아내는 이 늦은 시간까지 교회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연말 가요제에 몸이 불편하지만, 간신히 노래를 마치고 나오다가 무대 뒤에서 기침하는데 울컥하면서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폐결핵이 도진 것이다. 집으로 간신히 돌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우는데.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알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미안하였다.
제멋대로 살면서 가장 소중한 이들의 가슴을 짓밟고 살면서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나님 잘못 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내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날 이후 폐결핵이 거짓말처럼 치유되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경과도면서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어 갔다.

그 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복희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책에서는 복희가 밝히지 말라고 해서 기록이 없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종합해 보면 윤복희가 유주용(1940년생)과 1968년 결혼하여 1978년 이혼하고 가수 남진과 결혼(6개월 결혼 생활) 얽긴 이야기인 것 같다. 후에 윤복희는 무릎팍 도사(2011. 4.21) 출연하여 그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두 남자에게 아픔만 남겨 주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주용에게 충격에 빠뜨리려고 남진과 결혼하게 된 것을 두 남성에게 모두 미안하다고 했다. 윤복희가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유주용이었고, 남편이자 오빠이고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송에서는 연예활동에 방해된다고 해서 낙태를 했었다고 고백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 시절에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방에 들어박혀 지냈는데, 오빠 윤항기가 <여러분>이란 노래를 지어 불러 주었고, 그 노래에 감동하여 방문을 나왔다고 한다. 이 곡으로 1979년 서울 국제가요제 대상 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목회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도 생활을 위해서 여전히 밤무대에 나가고 있었다. 밤무대 일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법이 강화되어 저작권 사용료가 들어오기 시작하여 공부하면서 생활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 찬양신학교에서 구두회 박사 등 훌륭하신 스승을 만나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1992년 6월 미국 국제침례교회에서 음악목사 안수를 받았다.

먼 옛날 청계천 천막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시던 어머니,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걱정하시던 아버지, 그리고 교회 다니라고 권면하던 군대 동기, 월남에서 신부복으로 변장하고 정글에서 탈출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게 된 것은 아버지의 마약 복용으로 어머니가 남매를 살리기 위해 낭랑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었기에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주먹을 쥐고 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자신을 괴롭히던 일도 놀랍게도 아버지를 용서하면서부터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

신학교 사역이 힘들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또 닥친 시련은 아내가 식도암 3기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게 되었다. 1998년 10월 한양대학교에서 수술 받는 날도 수술이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결과를 보지 못하고 대전에 있는 모 교회의 집회 때문에 내려오게 되었다. 담임 목사님에게 아내의 수술 소식을 말씀드리니 강연 듣기보다는 성도들에게 아내의 수술을 잘되도록 합심 기도하자고 해서 중보 기도회가 되고 말았다. 집회가 끝날 무렵 아들에게서 수술이 잘 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는 기적처럼 완쾌되었고,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윤항기 목사에게는 자녀가 딸이 넷이고 뒤를 이어 교회음악에 헌신하고 있는 막내아들이 있다. 아내 정경신(숙명여대 가정과 1학년)은 공연 때마다 따라다니던 열성 팬이었다. 결혼(윤항기 24세)도 아내의 집에서 결사반대하여 둘이서 몰래 이태원 골목 여인숙 방 한 칸을 빌려 신접살림을 꾸렸다. 그러나 아내의 가족이 몰려와 끌고 가서 머리를 몽땅 자르고 집에 가두었다. 그러나 몰래 탈출하기를 몇 차례 하던 중에 아내가 임신하게 되면서 가족들도 물러셨다고 한다. 아내의 아버지가 광산업을 하는 다복한 가정의 셋째 딸이면서도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로 윤항기를 목사로 인도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공연을 두 차례를 하면서 1968년에는 꾸찌 공습에 당원들에게 신부 복장을 입혀 탈출하였고, 한번은 폐결핵에 걸려 귀국하게 되었다. 아내는 윤항기가 볼링에 미쳐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빚을 얻어 탕진할 때도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하었다.
이종환 선배의 도움으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윤항기 리사이틀’이 성공하면서 1973년 아내와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솔로 가수로 전향하였다. 매일 방송에 나가고 서울과 지방 공연을 다녔다. 밤마다 유흥업소에서 노래 부르고 끝나고 나면 사람들과 밤새 진탕 놀았다.

그러나 윤복희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차가 몇 바퀴 도는 엄청난 사고를 당하고도 살려 주신 일을 체험하게 되자 하나님께 굴복하고 되었고, 고 곽규석 목사가 집에서 하는 성경공부(지도 하영조 전도사)에 출석하게 되었다.

교회 마당이나 밟던 주차장 신자가 목사가 되고 신학교 총장이 되었다. 윤항기 목사가 총장으로 있는 예음음악신락교는 한국 교회음악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끝에 시작한 학교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신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훈련도 하지 않는다.

초대 국제 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를 맡아 17년째 섬기고 있다. 노래하는 목사로 살아온 지난 20년은 매우 귀중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정말로 행복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만들었던 곡은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주로 하는 데 비해, 새로 만든 곡들은 밝고 경쾌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다리던 오늘 그날이 왔어요
즐거운 날이에요
움츠렸던 어깨 답답한 가슴을
활짝 펴봐요.
가벼운 옷차림 다정한 벗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들과 산을 뛰며 노래를 불러요.
우리 모두 다 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여러분>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희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희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너의 기쁨이야
(1979년 서울 국제가요제 대상 수상)
<나는 당신을>
외로움 속에 지친 나를 누가 잡아주오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 진실한 사랑
비바람 부는 언덕 위에 나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망설이다 울어버렸소
구름 사이로 비친 한 줄기 햇살이
울고 있는 내 얼굴에 웃음을 띄워주네
세상 모든 이 나를 외면하여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리
고난과 시련이 나와 함께하여도 나는 당신을 따르리라
(1982 하와이 세계가요제 대상)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 로앤처치. All rights reserved.